개인 필요에 맞춰 지원 규모 결정하는 캐나다 복지의 힘
<장애인 복지, 캐나다에서 길을 찾다>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어떻게 가능할까.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푸르메재단 조사단이 그 실마리를 찾아 장애인 복지 선진국 캐나다로 떠났다. 장애인의 노후를 위해 국가가 함께 저축하는 세계 유일의 장애인 적금(RDSP) 제도, 돌봄 제공자와 집을 공유하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홈쉐어 제도,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통합형 임대주택 ‘코러스 아파트’ 등 캐나다의 복지 현장을 살펴보고, 진정한 장애인 복지 선진국을 향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9편>
최중증 장애인 1명에 연간 10억 원 지원
개인 필요에 맞춰 지원 규모 결정하는 캐나다 복지의 힘
보통의 주거, 보통의 일상, 보통의 참여를 지원하는 서비스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캐나다 복지 현장의 모습은 우리에게 낯선 경험이었다. 우리의 상식에 자리한 복지는 일정한 규칙을 통해 작동되는 표준적이고 계약적인 제공이나 지원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다른 캐나다 장애인 복지는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BC주 발달장애인 복지 책임지는 크라운 에이전시, CLBC
이에 대한 답은 우리가 방문한 브리티시 컬럼비아(BC)주 발달장애인 복지 시스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CLBC(Community Living BC)’에서 찾을 수 있었다. CLBC는 BC주에 거주하는 발달장애인의 신청을 받아서 개별적으로 필요한 서비스를 설계해 주고, 지역 내 수백 개 서비스 기관에 재정을 지원해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필요에 맞게 움직이도록 하는 중심 기관이다.

푸르메재단 조사단이 CLBC 포트무디(Port Mody) 지부에서 발달장애인 지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CLBC에서 설명을 듣던 중, 우리는 믿기 어려운 숫자를 마주했다. 최중증 장애인 1명을 지원하는 데 연간 100만 캐나다달러(한화 약 10억 원)가 넘는 예산이 투입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예산 대부분은 그 장애인을 지원하는 인력의 인건비였다. CLBC의 설명은 명쾌했다.
“특별한 경우지만, 24시간 내내 두 명의 지원 인력이 필요한 최중증 발달장애인이 있습니다. 하루 24시간을 3교대로 나누고, 주말과 휴가까지 고려한 대체 인력을 모두 포함하면, 그 한 사람을 위해 8~10명의 인력이 필요합니다. 100만 캐나다달러의 예산은 그 인건비와 제반 비용을 합한 것입니다.”
미리 설계된 표준서비스 매뉴얼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필요에 맞춰 지원의 강도와 규모를 결정하는 ‘필요에 맞는 지원’이라는 원칙을 지키기에 가능한 복지 체계이다.
CLBC의 가장 큰 힘은 주 정부로부터 받은 예산을 직접 배분하고 집행하는 막강한 예산 권한이다. 이 권한을 바탕으로 DDA, 유니티, 라르시(L’Arche Greater Vancouver)와 같은 수백 개의 서비스 제공기관과 직접 계약을 맺고, 이를 통해 개인에게 필요한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수백 개의 서비스 제공기관을 관리하는 방식은 인상적이었다. 일방적인 통제나 감시가 아닌, 파트너십에 기반한 품질 관리였다. 주기적으로 각 기관을 모니터링하지만, 그보다는 담당자가 수시로 기관과 소통하며 문제 해결 방안을 함께 논의하는 ‘지속적인 대화(ongoing conversation)’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신뢰를 바탕으로 자율성을 존중하되, 기관에서 학대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단호하게 개입할 수 있는 품질 보증 체계를 운영한다.

라르시(L’Arche) 밴쿠버에서 거주하는 고령 발달장애인의 모습
이처럼 강력한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 비밀은 CLBC의 독특한 법적 지위인 ‘크라운 에이전시(Crown Agency)’에 있었다. 크라운 에이전시는 ‘시민에게 특별히 중요한 분야’에 대하여 정부 재정으로 설립・운영되는 주 정부 산하의 공공기관이다. 공식적으로는 정부에 소속되지만, 독립적인 운영 권한을 갖는다. BC주에는 예술, 주택, 연료, 복권, 문화, 자연, 투자, 인력개발 등 30여 개 영역의 크라운 에이전시가 있다. 성인 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을 지원하는 CLBC가 ‘시민에게 특별하게 중요한 30대 공공기관’ 중 하나인 사실을 보면, BC주 발달장애인 지원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온기는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의 과제: 한국 상황에 맞는 새로운 모델 ‘발명’해야
하지만 CLBC 역시 나름의 고민과 한계를 안고 있었다. 정부로부터 받는 예산은 총액이 정해져 있어,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늘어나도 그만큼 충분히 예산을 늘릴 수는 없는 현실적인 제약이다.
요즈음 CLBC의 가장 큰 고민은 BC주의 심각한 ‘주거 문제’와 장애 인구의 ‘고령화’다. 특히 발달장애인의 경우 40대부터 조기 치매가 나타나는 경향에 주목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건부(Health), 아동가족개발부(MCFD) 등 다른 정부 부처와의 협력을 필수로 여긴다. 또한 BC 주택공사(BC Housing) 및 여러 주거 협동조합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새로운 주거 공간에 장애인 세대를 의무적으로 확보하도록 요구하는 등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유니티가 운영하는 캐나다의 장애인 주택 ‘코러스 아파트’에 거주하는
발달장애인 크리스타 밀네(왼쪽) 씨가 자신의 집에서 손님들과 대화하고 있다.
이번 캐나다 연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발견’하게 했다. 미래를 준비하는 든든한 적금(RDSP), 당사자의 목소리로 집을 짓는 사람들(유니티), 새로운 가족의 탄생(홈쉐어), 한 사람의 생애주기 전체를 품는 통합 서비스(DDA), 평생에 걸친 예술 활동(비쿠냐 아트 스튜디오), 그리고 이 모두를 움직이는 중심 기관(CLBC)을 접하며 우리 현실과 비교하게 됐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지원 서비스는 장애인복지관, 거주시설, 임대주택, 활동지원, 주간보호, 단기보호, 고용지원, 권익옹호, 개인별지원, 가족지원, 발달재활, 건강지원, 보조기기, 주간활동, 최중증돌봄 등으로 종류가 다양하지만, 한 사람을 중심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운 구조다. 캐나다처럼 한 사람의 주거, 일상생활, 사회참여가 연결되어 자연스러운 일상을 이루려면, 장애 당사자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집, 지원주택, 홈쉐어, 그룹홈 등의 다양한 주거 대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 주거지에 살면서 어떤 날에는 지역사회 안의 서비스 제공 센터(drop in center)에서 좋아하는 활동을 즐기고, 동시에 낮에는 주간 프로그램(day program)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본인이 원한다면 고용 지원 서비스(employment services)의 지원을 받아 일주일에 하루든 이틀이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일상은 특정 서비스의 양보다는 다양한 서비스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가능해진다.

푸르메재단 조사단이 만난 발달장애인 커스틴 메인(Kirsteen Main) 씨 모습. 그는 말하거나 글을 쓸 수 없지만,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활자판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시집 ‘Dear Butterfly’ 펴내는 등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표준적이고 분절된 서비스가 누적하여 확대된 서비스 제도에서 일선의 민간법인, 일선의 복지기관은 이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천을 구현해야 한다. 캐나다 연수를 마치면서 우리나라 제도가 더 연결되도록 개선하는 노력이 중요하지만, 일선에서 일하는 우리는 이런 제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시도와 실천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였다. 현장의 눈높이에서 보면 캐나다의 훌륭한 실천을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한국적 상황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발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좋은 장애인 복지란, 단순히 돈을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과 관계와 기회를 촘촘하게 ‘연결’해 주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푸르메재단을 비롯한 우리나라 장애인복지 기관 및 단체들의 역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직접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지만, 사람과 사람, 기관과 기관, 마음과 마음을 잇는 ‘연결자’가 되어야 한다.
캐나다에서의 여정은 끝났지만, 우리의 진짜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발견한 것들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 맞는 새로운 연결의 방식을 발명해 나가는 길. 그 길 위에서 더 많은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애쓸 것이다.
글=김용득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푸르메재단 이사)
사진=푸르메재단